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서양 전투 (문단 편집) == 제1기: 1939년 ~ 1940년 6월 == 2차 대전 개전 후 지상전에서 일방적으로 발린 끝에 [[유럽]] 본토를 독일이 석권하자 영국은 [[1차 대전]]의 악몽, 즉 "무제한 잠수함 작전"(Unrestricted submarine warfare)이 재현되리라는 공포에 떨었다. [[석유]]를 비롯한 전략 물자와 식량의 '''절반'''을 해상 보급에 의존하는 영국에게는 사실상 나라의 운명이 썩어가는 동아줄에 매달린 것에 다름 없었다. 그러나 독일로서도 대해군국 영국의 함대를 물리치고 해상봉쇄를 추진하기에는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당장 1차 대전 패전 후에 [[잠수함]]은 아예 보유가 금지되었고, 나머지 해군 전력은 무늬만 남을 정도로 제한받았으며,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해군 재건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아 재무장을 시작할 때도 우선 수상함 전력부터 확충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개전시 U보트 전력은 고작 56척, 게다가 그중 일부는 실제 전투에 써먹기 어려운 실험용 잠수함이나, 항속거리가 절망적으로 짧고 어뢰는 고작 몇발밖에 싣지 못해 '''나막신'''이라고 불린 연안용 잠수함이었다. 개전 후 대서양 전투의 첫 포성은 독일측이 열었다. [[1939년]] 9월 3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직후 마침 대서양에서 초계 활동 중이던 U-30이 그 사실을 무선으로 통보받은 직후 무장상선으로 추정되는 영국 선박을 발견, 어뢰를 발사하여 격침시킨다. 그러나 이 배는 무장상선이 아닌 [[캐나다]]로 향하던 [[여객선]] 아테니아(Athenia)호였으며 사망자 중에 아직 중립이던 미국인까지 있었던 터라 루시타니아 호 격침 사건의 악몽이 있던 독일은 사건 초기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영국측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영국을 오래도록 괴롭힐 대서양 전투의 서막이었다. 악몽은 계속되었다. 9월 17일, U-29가 영국 해군 [[항공모함]] 커레이져스를 격침시켰고, 10월 14일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귄터 프린]]의 U-47'''이 영국 해군의 모항 스캐퍼플로우에 잠입하여 리벤지급 [[전함]] 로열 오크를 격침시킨다.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의 아픈 기억을 씻어내며 동시에 영국에게 모항도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 위협적인 일격이었고 영국은 충격에 빠진다. 이후로도 유보트들은 영국 동해안의 항구와 해안에 [[기뢰]]를 부설하는 등 공격적인 공세를 취했다. 반면, 독일 해군의 수상함대는 굴욕을 면치 못했다. 개전 당시 해외에 있던 포켓 전함 [[그라프 쉬페]]가 남대서양에서 통상파괴전에 나서며 [[SMS 엠덴]]의 신화를 다시 한 번 쓰려했으나, 상선 9척을 격침시키고 영국군에 의해 쫓겨 중립국 [[우루과이]]로 내몰린 뒤 자침하고 만다. 결국 크릭스마리네는 기존의 수상함 주류에서 [[잠수함]]을 주력으로 삼게끔 전략을 수정하게 된다. 하지만 [[노르웨이 침공]]에서 무리하게 동원하다가 잃어버린 U보트 숫자도 20여 척에 육박했기 때문에 U보트가 그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